6일 현충일
‘의로운 희생’ 추모 열기 뜨겁다
생명 구하다 숨진 의사상자 48명 국립대전현충원 안장
여덟살 소년 영웅부터 ‘초인종 의인’까지… 참배객 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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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훈 기자 jprime@cctoday.co.kr


나라를 굳건히 지키다 산화한 호국영령들이 잠든 국립대전현충원. 이곳은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한 군인과 경찰은 물론 다른 사람을 구하다 숨진 48명의 의로운 희생자들도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의사상자 묘역 첫 안장자는 채종민 씨다. 당시 35세였던 채 씨는 2006년 7월 27일 전남 진도군 서망해수욕장에서 파도에 휩쓸려간 초등학생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초등학생은 다행히 구조됐으나 채 씨만 다시 파도에 떠밀려 결국 1시간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여덟 살에 불과한 소년 영웅도 이곳에 영면해있다. 2005년 여름 초등학생 변지찬 군은 충남 당진의 외가 근처로 물놀이를 갔다가 하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친구를 발견했다. 변 군은 같이 있던 형의 만류에도 지체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친구를 구하려 했지만, 결국 함께 숨진 채 발견돼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의사상자 묘역은 2006년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서 2007년 대전현충원에 조성됐다. 정부로부터 의사자로 인정된 사람이나 의상자로 인정됐다가 나중에 숨진 이들이 이곳에 안장된다.

새벽 시간 불이 난 건물 집집마다 초인종을 눌러 이웃을 대피시킨 ‘초인종 의인’ 안치범 씨 유해도 이곳에 있다. 안 씨는 지난해 9월 9일 새벽 서울 마포구 한 원룸 빌라에 불이 나자 119 신고 후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집집마다 초인종을 눌러 이웃을 깨워 대피시켰지만, 자신은 결국 연기에 질식해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고속도로에서 사고자를 돕다 희생한 이들도 있다. 당시 20대 초반이던 황지영(21) 씨와 금나래(22) 씨는 2009년 8월 9일 함께 차를 타고 서해안고속도로 서천 나들목 부근에서 중앙분리대를 들이 받은 사고를 목격했다. 이들은 1차로에 차를 세운 뒤 사고 차량 옆에서 수신호를 하며 구조 작업을 돕다 뒤따라오던 차량에 치여 함께 숨을 거뒀다. 이들은 이듬해 ‘올해의 시민 영웅상’을 받기도 했다.

남극 세종과학기지에서 조난을 당한 동료를 구하러가다 불의의 사고로 숨진 전재규(당시 27) 씨도 있다. 2003년 12월 7일 기상악화로 귀환하지 못한 3명의 팀원을 구조하러 갔다가 사망한 그는 이후 국민훈장 석류장에 추서됐다. 전 씨를 비롯한 전 대원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동료애를 기리기 위해 이듬해 외국 연구팀이 발견한 해저화산은 ‘전재규 화산’으로 명명됐다.

대전현충원 관계자는 “현충일을 앞두고 의사상자 묘역을 찾는 참배객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면서 “이들의 의로운 희생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은 우리 모두가 해야할 일”이라고 말했다.

조재근 기자 jack333@cctoday.co.kr

Posted by 충투 기자단 :

어느 분향소 풍경

2009. 5. 30. 10:56 from cci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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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前) 대통령의 서거를 추모하는 추모제가 대전 중구 서대전시민광장에서 조문객 1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이날 추모제에 참가한 조문객들은 모두 한 손에 촛불을 든 채로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했다.

이날 추모제는 갑자스레 서거한 노 전 대통령의 명복을 바라는 지역민들의 마음을 담아 지난 26일 결성된 노 전 대통령 대전추모위원회가 마련한 것이다.

추모제는 원불교 대전교구의 천도제를 시작으로 열음굿, 추모영상 상영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노 전 대통령의 생전 영상이 상영되자, 영상을 지켜보던 많은 조문객들은 눈가에 눈시울을 붉혔고 일부 조문객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기도 했다.

김 모(48) 씨는 “노 전 대통령의 생전 모습을 영상으로 지켜보니까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다”며 “하지만 우리 가슴 속에는 항상 노 전 대통령이 살아 계실 것”이라고 흐느꼈다. 또 노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추모시 낭송과 추모노래 공연 등이 이어지면서 조문객들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이 모(63·여) 씨는 “서대전시민광장에 분향소가 세워진 지난 24일부터 하루에 한 번 씩 이곳을 찾아 조문을 하고 있다”며 “올 때마다 갑자기 서거하신 노 전 대통령의 생각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처럼 많은 조문객들이 노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며, 서거를 애도하고 있다. 분향을 하기 위해 줄을 선 조문객들의 행렬이 서대전시민광장을 에워싼 것도 모자라 중구 대사동 농협 충남본부까지 이어진 것.

또 분향하려는 조문객들 중에는 환자복을 입은 환자까지 섞여 있어 남녀노소 누구를 불문하고 모두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슬퍼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대전추모위원회 관계자는 “대전 시민들의 추모 물결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며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권위주의와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한 노 전 대통령의 명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말했다.

박진환·이성우 기자
동영상=허만진 영상기자 hmj1985@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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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을 추모하며

2008. 10. 3. 09:21 from 사는이야기

최진실을 추모하며

아, 이 시대의 별이여

만인의 연인으로 살다간 별이여

배우로 살고 드라마처럼 살다 영화처럼 떠난 여인이여

불혹의 세월이 그리도 서러웠더냐

배우의 세월이 그리도 서글펐더냐

타인의 삶은 그리도 잘 사셨소만

어찌 자신의 삶은 그리도 무심케 버리셨소

연기하는 것처럼 살면 될 것을…

연기하는 것처럼 웃으면 될 것을…

바람처럼 떠나버린 그대여

연기처럼 사라져간 그대여

울지 마오, 울지 마오

지상에서 다 못한 무대 있거든

천상의 무대서 그 영광 다시 한번 누리소서

가슴에 묻어두오

가슴을 비어두오

그 가슴 따뜻이 품어 안고 편안히 영면하소서

                                                 <2008년 10월 2일 나재필  拜上>


▶별이 떨어졌다. 그녀는 스타 중 빅스타였다. 88년 청춘스타로 떠 20년 연기생활 내내 최정상에 있었다. 그가 뜨면 드라마가 떴고 그가 나오면 대박이 났다. 그야말로 흥행의 여신이었다. 이영자, 정선희, 이소라, 홍진경, 엄정화와 ‘6총사’의 우정을 나눈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로, 전 국민의 배우로 장밋빛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연예계 데뷔전 극심한 가난 때문에 자살을 여러 번 시도했었고 매니저 배병수가 살해당하고 조성민과 파경을 겪으며 풍상고초(風霜苦楚)의 삶을 살았다. 불혹을 넘기면서는 '줌마렐라' 열풍의 중심에 서 있었고 만인의 연인으로 중년의 남자들을 여전히 설레게 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1993년 영화 ‘사랑하고 싶은 여자 & 결혼하고 싶은 여자’ 촬영장에서였다. 서울 충무로 시나리오작가 교육원에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당대 최고의 청순배우를 직접 만났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했다. 흰 블라우스와 청바지 차림의 그녀에게서 후광(後光)이 났다. 그녀를 염탐하는 동안 내내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작가가 꼭 되어 그녀를 내 시나리오의 여배우로 캐스팅하리라 목표를 세우기도 했다. 그것은 이 시대 최고의 여배우를 향한 꿈이자 짝사랑이었다.

▶그로부터 6년 후 여의도 국민일보 CCMM 빌딩내 스포츠투데이 신문사에서 그녀를 두 번째 만났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톱스타였다. 여인의 향기가 났다. 그녀의 흰 손과 악수하며 전율했다. 미소마저도 흰 빛깔로 빛났다. 그녀는 1968년 12월생으로 나보다 10개월 늦은 동갑내기다. 마흔 한 살. 
시나리오 나재필. 배우 최진실
나의 꿈은 하늘이 열리는 개천절 전날, 2008년 10월 2일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녀가 하늘로 떠난 것이다.
Posted by 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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